어떤 사랑도 기록하지 말기를

🔖 단어들

우리가 각인된 유령을 불러냈을 때 모두 벗고 있었다. 투명한 시선은 육체를 통과하니까. 우리는 서로의 몸을 만졌는데 미끄럽고 징그러웠지. 이 촉수 같은 시선은 뭐지. 자꾸만 만지니까 검어진다. 검은 유령들이 우리의 내부를 뚫고 다른 풍경으로 빨려 들어갔다. 돌가루가 떠도는 곳 무화과 열매가 떨어지는 곳 언 손이 녹아내리는 곳 벌거벗은 채 언덕 위에서 언제까지 같은 자세로 뒹굴어야 할까요 아무리 외쳐도 물만 흐르는 곳 그래도 우리는 묵묵히 충격을 흡수한다. 우리는 버려진 유령이니까 달라질 게 없지. 삶을 기록하라는 신의 명언은 지하로 스며든다. 쓸 수가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데. 흑탄으로 쓰면 구름도 검게 부푼다. 우리가 구름처럼 검은 빗물로 가득 차면 현명한 노인이 될 수 있을까. 만져지지 않는 시간을 통과하는 형벌. 흰 셔츠를 풀고 맑은 땀을 흘리는 안쪽의 우리에게 손을 뻗어본다. 천천히 폭풍이 몰려오는 이 언덕에서 미끄러지며 우리는 무엇이 될까. 춥고 피로한 슬픔의 형태로.

🔖 문장 연습

인간적인 좀비가 되는 꿈을 꾸었는데. 얼굴이 부서지고 핏물이 뚝뚝 떨어지는 신기한 몸이란 문장을 움켜쥐기에는 나약하다는 것을 알았지. 인간일 때는 몰랐던 세계의 일그러짐이 유연한 몸을 만들고. 타액이 서로에게 섞여들어도 눈물인 줄 모르고. 그냥 우리는 상처를 입히는 것이 전부인 줄 알았지. 그렇잖아. 한때는 운동장이 세계의 끝이라고 생각하고 떨어질 듯 구석에 서서 서로를 밀어버리다가. 유연하게 다친다는 것도 결국 무서운 일이라고 침을 흘리곤 했었잖아. 철봉에 매달려 하늘로 올라갈 듯 휘휘 돌다가. 자라지 못한 순간부터 이 통증들은 신기한 몸의 일부라는 것을 알았지. 우리는 자꾸만 짓물러지는 서로의 팔둑에 문장들을 새겨 넣으려다가 실패하고. 그게 어찌나 재미있던지 멈추지 않고 물어뜯었잖아. 아무리 밀어도 밖에서 잠긴 문밖으로는 밀려나지 않아서 그게 어찌나 스릴 있던지. 너는 약해서 죄를 짓는 거야. 네가 낄낄거리며 나를 끌고 운동장을 달렸는데. 인간적인 좀비가 되는 꿈은 아주 오래된 꿈. 그것을 적으려면 한 번은 죽어야 한다고 네가 말했지. 죽고 나면 아무 문장도 움켜쥘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고. 운동장에서 울고 있던 내가 아무것도 쓸 수 없게 된다는 것을 나는 꿈 밖으로 밀려나와 알게 되었지. 어쩌면 약해도 멈출 수 없는 운동장의 세계란 그런 것일까.

🔖 유광 자원

하루 종일 어깨를 빛에 대고 있으면 부패의 흔적. 그는 조용히 눈을 뜬다. 빛에서 썩은 날개가 떨어지고 있다. 횡단보도에서는 늙은 개가 일어나지 못하고 뜨거워진다. 지금 내 얼굴은 붉은가. 그가 중얼거린다. 건널목에 핏자국이 빠르게 퍼진다. 공무원은 어디 갔지. 아무도 저 뜨거운 순간을 기록할 수 없는 거지. 그는 손가락을 빨고 있다. 침을 흘리며. 이런 악취는 빛에서 떨어지나. 툭툭 철근을 걷어차다 보면 냄새를 만지게 된다. 이곳으로 모이는 모든 고물은 감각의 일종. 부스러기들이 웅성대고 있다. 놀란 사람들이 늙은 개의 정수리를 긴 막대로 건드리고 있다. 불행의 감각은 너무 가까운 감촉. 그는 무너져 내리는 어깨뼈를 문에 기대고 있다. 이 문은 닫힌 적이 없다. 건물 관리인은 어디로 간 거지. 침이 줄줄 옷 속으로 스며드는데. 샤워 꼭지를 만지다 보면 알 수 있지. 울지 않고도 깊어질 수 있다. 이 맑고도 끈끈한 부정의 얼룩들 매일매일 손금처럼 번지는 핏자국들 그는 조금씩 부서지며 개의 다리를 끌고 온다. 이렇게 이번 삶이 끝나지 않는다면 이 고물은 좀더 생생한 감각이야. 지금 그의 얼굴은 붉은가. 고물상 한가운데에 묘지를 파는 그의 손은. 버려지지 않은 것들은 어디로 갔지. 아무도 이 이상하고 슬픈 순간은 기록할 수 없는 거지.

🔖 영토

너의 아름다운 공터. 자라다 만 나무가 있고, 죽지 못한 돌이 있지. 빛이 자기 자신을 그리다 말고 흩어지는 모서리.

나는 놀러 간다. 아무도 오지 않는 그곳에 맨발로 간다. 부서진 욕조 안에서 거미가 어둠을 잇고 있을 때. 너는 모서리에서 떨어지던 기다란 선 하나를 밝고 서 있지.

선 바깥으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네가 쓴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는 맨발을 비볐지. 자기 자신을 그릴 줄 아는 것은 자연뿐 우리는 아무것도 그릴 수가 없어서

기울어진 것이 좋아. 너는 중얼거리며 세상에는 없는 각도로 휘어지고 있었지. 부드러운 그물이 살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가장 어지럽고 가장 치명적인 이곳은 너의 아름다운 그릇. 휘어진 너는 어디에도 가닿지 않고 싶어서 텅 빈 욕조를 두드려 보았지. 목마르고 배고픔이 가득해.

우리는 자꾸만 만난다.

서로를 만질 수 없어서 어쩔 수 없이 깊어지고.

모든 것이 빼곡한 나의 아름다운 욕조. 세상을 닮아야만 너에게 말을 걸 수 있나. 너는 이미 각도 바깥으로 사라졌는데

🔖 휴일

내게 아이라는 시간이 다시 오지 않고

앞으로도 아이라는 공간에서 뒹굴 수가 없고

창밖에서

공원을 가로질러

아이라는 폐허가 걸어간다

뒤뚱거리며 개를 쫓아가는

인간이라기엔 너무나 눈부시고

눈부시기에는 너무나 짧고 짧은

순간의 물질이

이 사회는 아이를 키우기에 적당하지 않은 시간입니다

모든 것을 바쳐서 내가 죽음 하나 얻는 공간입니다

그러니 아이는 시간과 공간을 합쳐서 다시 사라지느

아름답고 쓸쓸한 과학의 오류일까요

늙은 과학자들은 고심합니다

이 사회여서가 아니라

이 사회를 끊기 위해서

모든 달콤함을 버리고

폐허가 된 아이를 해방시키는 방법

실험실에서 쥐를 껴안고

우리가 우리를 인간이라고 말하기에 너무 처참한 것은

인간을 낳고 자꾸 낳아서

눈부신 멸망을 찾아가기 때문일가요

공원엔느 눈먼 사냥개들이 가득하고

🔖 결혼

그는 아름답고 복잡한 사람을 보면 외계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는 한때 피라미드 내부로 들어가서 돌 위에 머리를 찍은 적이 있었지요. 한번 내리찍은 머리는 멈추지 못하고 밤이 사라질 때까지 부서지고 있었습니다. 서른이 온다는 것은 무엇일까, 중얼거리면서. 마당이 넓은 곳에 묻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요. 깊고 뾰족한 집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어울리지 않으니 나는 잠시 외계인의 머리를 빌려 쓰고 있었습니다. 피라미드의 입구를 빠져나왔지만 아무도 나를 보지 못했지요. 이것은 머리가 없어서 아름다운 일. 그때부터 나는 바람처럼 달리다 멈추고 내 몸을 돌돌 말아 수많은 구멍들을 밤의 내부로 흘려보냈습니다. 우리가 밤을 걸으면 발자국도 없이 굳는다는 것을 모른 채. 돌의 숲. 그는 이불의 각을 정확하게 맞추는 사람이고 나는 그 위에 엎어져 자꾸만 돌가루를 떨어뜨립니다. 우리가 만난 것은 추방되었기 때문일지도 몰라. 아무도 돌의 내부로는 찾아오지 않지. 이렇게 빛나는 울음이 많은데, 황폐하고 쓸쓸한 눈부신 광물들이 우리를 감싸고 있는데, 그는 기억의 일부로 추락해 버린 외계인을 그리워하며 신발장에 못질을 합니다. 나는 숲의 일부가 되어 딱딱하게 굳어 갑니다. 이것은 머리부터 시작되었습니다. 피라미드에 서른을 두고 돌만 얻어온 나는 머리도 없이 자라는 광물에 대한 책을 읽고 있습니다. 나는 무엇 때문에 지구의 글자를 사랑하게 되었던 것일까요. 궤도의 이탈과 회전하는 가루들 속에서 어지러움으로 이루어진 물질일까요. 나는 숲이라는 기억의 일부로 그의 마음속으로 들어갑니다. 아름답게 추락하는 광물의 에너지. 이렇게 우리가 합쳐지면 자연에서 멀어지는 것인가.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인가. 그는 내가 떨어뜨린 피라미드의 머리를 쓰고 웃습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딱딱한 숲 속에서 그는 조용히 불을 피웁니다. 돌처럼 복잡한 우리의 내부에.